불교 바로알기 제 1

[불교 바로알기 1제] 무애거사

위빠사나라는 건 대체 뭐냐?
우리가 출가수도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는 거거든요. 이걸 위법망구(爲法忘軀)라 하는데… 이 세상 좋은 줄 알았는데 말씀 듣고 보니 고해였다 세상이 공허해서 꿈처럼 실체 없는 헛모양 뿐이다 그래서 무얼 바란다는 것 자체가 헛 될 뿐 아니라 삼계 만물이나 나조차도 공(空)하고 무상(無相)이고 무원(無願)이고 무아(無我)다. 이런 이치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보여도 이거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겁니다. 또한 부처님 지혜의 정수예요. 무아(無我)다 중도(中道)다 말은 쉽지만 불교 이치는 중생으로서는 알아먹기가 참 어려운 거요. 유식(唯識)을 예로 들면 요새 말만 유식(唯識)한다 떠벌리는 거지 종당엔 다 유식(唯識) 이치를 못 믿고 저 편한 대로 반만 믿는 반식(半識)으로 돌아서거든요.
지금 한국이나 외국이나 유식 공부한다 하는 똑똑하신 학자님들 다 이 모양이라오. 사실 부처님 말씀을 한번 귀로 들었으면 이치도 마음에 비춰져서 바로 담겨져야 하는데. 실상은 안 그렇습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자기가 안 게 아니라 부처님께 얻어듣고 겨우 알 듯도 한 건 대 마음속 깊이 체득하지는 못하지요. 만약에 한 번 듣고 심득(心得)했다 하면 그건 타고난 도인이요. 또 자기가 스스로 알았다 하면 그건 연각ᆞ벽지불이라 하는 겁니다.
겨우 귀동냥해서 말만 그럴 듯 해진 것이라, 그래서 성문(聲聞) 즉 귀가 보배인 중생이다 그러는 건데 어쨌든 이걸 어찌 말하냐 하면, 얻어 들은 부처님 지혜법문은 달빛인데 중생 마음이 탐ᆞ진ᆞ치에 마냥 흔들려서 저 달빛 같은 부처님 지혜 법문이 호수 같은 내 마음에 비춰지지 못하여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이지 귀동냥해서 겨우 얻은 지혜를 믿음 속에서 진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처님 말씀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히는 거예요. 이걸 지(止) ᆞ 정(定) 또는 ‘사마타’라 하는데 흔히 선정에 든다 이렇게 말하지요. 그러면 귀동냥한 부처님 지혜 법문은 이치만 그런 줄 알지 실제로 번뇌를 끊는 힘이 없다 해서 말라죽은 건혜(乾慧)라 하는데. 이 건혜를 살려서 한 번 번뇌를 끊어보자 해서 선정을 닦아 자꾸 관찰 사유(思惟)하는 것을 지(止)에 상대해서는 관(觀)이라 하고 정(定)에 상대해서는 혜(慧)라 하고 사마타에 상대해서는 위빠사나라 부르는 거요.
그런데 처음 선정을 닦는 때는 마음이 자꾸 흩어져서 부처님 말씀에 염주(念住)하기는커녕 자기 마음도 갈피를 못 잡거든요. 이때는 수식관(數息觀) 등등 방편을 써서 마음을 다잡게 하고 부처님 지혜 법문을 관찰해야 하는 법인데 막상 마음이 침착 조용해지면 그만 부처님 지혜 법문도 묻혀져서 멍해지거든요. 그래서 무기(無記)에 빠져 멍해지는 외도선(外道禪) 즉 명상(冥想)에 빠지지 않도록, 아침마다 부처님 말씀을 외우는 것을 송경(誦經)이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수타비 사원에서 새벽마다 들었을 텐데 송경과 선정은 이렇게 같이 가는 겁니다. 화두 참선은 송경과 참선이 통합된 거라 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송경을 잘해야 선정 즉 사마타 수행도 바로 서는 겁니다.
사마타는 위빠사나의 인(因)이고 위빠사나는 사마타의 과(果)인데, 사마타가 부처님 말씀을 독송하는 송경을 통해서 정화 감득(感得)되면 이를 이계인(離繫因) 즉 해탈하는 원인이라 그럽니다. 다시 말하면 선정 즉 사마타는 과일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서 잘 키우는 거고 송경은 부처님 지혜에 의지해서 열매가 잘 맺도록 가지를 유인하고 전지 전정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답니다.
이렇게 선정을 닦아 가면 점차로 부처님 말씀 즉 관혜(觀慧) 속에서 선정이 점점 깊어지는데… 문제는 잡념 때문에 또 바깥 사물경계에 마음이 흘러가서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거죠.
밥을 먹으면서도 문득 맛이 있다 없다는 한 생각, 공양하는 사람 보고는 잘 사네 못 사네 잘 생겼네 못 생겼네… 이런 잡념 한 번에 몇 일동안 밤새서 공부한 것이 그냥 날아갑니다.
이런 경우 화두를 실참(實參)하는 간화선에서는 조도(助道)로 삼는 것이 예참 아니면 주력인데, 남방에서의 고(苦)ᆞ집(集)ᆞ멸(滅)ᆞ도(道) 사제(四諦)의 행상(行相)을 순차적으로 수습하는 선법(禪法)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는 방편을 쓰지만 실제로 조절하기 매우 어려운 게 문제. 그래서 결국 계율로 외행(外行)부터 콘트롤 하는 겁니다.
마음의 이탈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108중학법(衆學法)으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절제하고 의업(意業)으로는 생각이 밖으로 흐르면 일체가 공(空)하고 무상(無常)하고 무원(無願)인데 너는 무엇에 집착하는고 되새겨서 마음을 추스립니다. 결국은 내 심원의마(心猿意馬)를 부처님의 지혜 말씀으로 조복시킨다 해서 관혜(觀慧)의 관(觀) 즉 진짜 위빠사나인 제현관(諦現觀)이라 부르는 거지 요새 엉덩이 뿔난 것들이 저 남방에 가서 고잉카 아무개 등등 사이비한테 배웠다 자랑하는 소위 <마음 챙긴다는 가짜 위빠사나> 하곤 아주 다른 거요.

<내 소견(所見)으로 내 마음을 관(觀)하는 것을 관(觀) 즉 위빠사나라 하지 못하는 이치>는 중생의 시커먼 무명심(無明心)에 일체가 다 깜깜 절벽인데 본디 없는 마음을 스스로 본다거나 원래 없는 망상을 자기가 알아차린다 하는 것은 다 소경이 개꿈 꾸는 헛소리기 때문예요. 이런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위빠사나는 사실 비구율의의 구족계에 포함되는 것인지라 미얀마나 태국에 가서 단기 출가라도 해야 작동하는 선법(禪法)인데도 이를 율법(律法)이라 안하고 염처(念處)라 하는 것은 그 심행(心行)을 단속하는 바탕이 혜심(慧心)에 주(住)하기 때문에 이름을 염처(念處)라 그러는 거랍니다
그렇게 계속 위빠사나를 감득하는 사마타를 열심히 가행 정진하다 보면 마음도 부처님의 혜심과 하나 되어 잡념 없이 성성(惺惺)해지다가 마침내 삼계가 고해임을 증득하는 부처님 말씀의 지혜 법문 즉 사제(四諦)의 도(道)에 들어가면 비로소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도인(道人)이라 하고 또 이때부터 현관(現觀)이라 하여 공부길이 열리는 거지 소나 개나 겉모양 흉내 낸다고 공부라 하는 게 아니예요.
요새 저 위빠사나니 뭐니 깨춤 추는 것들 알고 보면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 깨진 꼴예요.
우리 앞산에도 절이 하나 거창한 게 생겼는데 선방이랍시고 하나 지어놓고 참선하실 분 위빠사나 하는 분 이렇게 섞어놨대요. 그래서 총무하고 한번 가봤더니 법당은 쥐새끼 한 마리도 없는데 옆의 산신각에서는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진진하니 낭자한데 신발이 주변에 가득 발 디딜 틈도 없이 벗어놨더라는… 이렇도록 본분사의 본 자도 모르는 그 절 주인을 가지고 다들 큰스님으로 대접하는가 본데….. 이런 꼴들 안 보고 안 듣고 사는 것도 사실 오복 중 하나예요.
나는 법전대사 열반하시고는 아무데도 안 가는데. 하여튼 님들 아잔간하 존자(尊者)님을 부지런히 참방(參訪)해서 성불하는 선근(善根)을 깊이 심어가셔요.
사두,!

보충1)
송경(誦經)은 자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부처님 말씀을 깊이 억념(憶念)해서 전오식(前五識)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훈습(熏習)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선정의 길이 되게 만드는 거지요. 요새 먹물 도깨비들 교리공부 한답시고 알음알이로 문자 희롱하는 희론(戱論) 즉 간경(看經)하곤 근본적으로 달라요.
그래서 예전의 강원의 송경(誦經)하는 이력(履歷)이 참선하는데 아주 중요했던 거예요. 근데 다 망가졌죠. 강원의 이력(履歷)이 망하니까 선방(禪房)도 망가진 거지요.
우리가 배움터라 생각하는 대학이란 데는 자칫하면 사실 수행과 아무 상관없는 희론처(戱論處)로 빠진다는 걸 모르니. 송경(誦經)을 중심하던 강원이 희론(戱論)의 알음알이 간경 위주로 바뀌는 것도 다 시절인연이고 말세라서 그런 거요. 그나마 해인사가 겨우 겨우 강맥(講脈)을 잇다가 종당엔 간경의 알음알이에 목 매달던 주지 하나 잘못 만나서 박살나지 않았나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복 받은 사람들예요. 멀리 아잔간하 존자(尊者)까지 찿아뵈었으니… 열심히들 심방(尋訪)해서 공부 많이들 하셔.

보충2)
이렇게 송경과 선정을 수습하면서 마음이 흩어질 때마다 마음 챙긴다 하여 스스로 공(空)ᆞ무상(無常)ᆞ무원(無願)을 되새기면서 선정을 수습하다보면 드디어 부처님 말씀이 눈앞에 현전(現前)되거든요.
이걸 발심했다 하는데… 이처럼 지행(知行)이 일치(一致)되기 시작하면 이제 부처님 지혜 법문에 들어 계속 선정을 닦아 지혜를 발명해서 심지(心地) 즉 마음의 팔만사천 번뇌를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끊어 가는데… (이걸 감업[減業]이라 그럼) 처음 공부할 때 학교 보내자면 똥오줌부터 가려야 한다 해서는… 간신히 부처님 말씀 한 두 마디 익혀 마음을 단속하는 단계를 가지고 마구니들이 공부인척 증상만(增上慢)을 내는데.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러니까 머리 몸통 다 버리고 달랑 꼬랑지 하나 줏어다 자랑하는 모양인데.. 이에 대해 아잔간하 존자(尊者)께서는 면도칼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도끼마냥 선정(禪定)의 무게가 보태지지 않으면 나무 못 자른다 말씀하셨거든요
사실 남방에도 한국 못지 않게 사기꾼 득실거리니까 조심해야 되요.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위빠사나 패거리들도 알고 보면 다 일지반해(一知半解)하는 이상한 작자들이니까 조심 또 조심.!
저것들 모이는 데가 무슨무슨 마을이래요. 그래서 휴게소에서 파는 호두과자 모두 저들이 만들어 파는 줄 알았어요. 하여튼 엉덩이에 뿔 난 것들 이름도 개판으로 지어서 사람 헛갈리게 만드는 데는 재주가 비상한 것 같아요
부처님 지혜 법문이 내 마음에 감득(感得)되면 일체 경계의 묘법(妙法)이 즉시에 환해져서 눈을 떠도 보이고 감아도 환해지는데 이걸 현관(現觀) 즉 abhisamaya라 합니다. 현관(現觀)이 깊어져서 승진하다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도제(道諦) 단계에 들어가면 드디어 몽중일여(夢中一如)나 오매일여(寤昧一如)가 차례로 열리는데 남방에서는 그냥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그래요. 이것만을 공부라 하는 거지 개코도 모르면서 맘 챙긴다고 돌아다니는 건 그냥 병이요. 병.
제대로 묵묵히 깊이 하심해서 공부 수행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인기나 얻고 돈이나 벌고 남들 안 하는거 좀 신기해 보이는 거 이런 못난 짓들만 찿아다니며 잘난 척하는 것은 말예요… 내가 보기엔 모두 업장이 두터워서 그러는 걸로 보이거든요. 이거 스스로 업장부터 녹이게끔 잘 가르쳐 줘야 해요. 시급해요.
사두.!

보충3)
지금 사마타와 위빠사나 관계가 어떠하냐? 이렇게 질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사마타[지(止)]는 마음을 적정 고요케 하되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해서 하나의 경계에 안정(安定)시키는 거요.
왜 그래야 하냐 하면 부처님의 지혜 말씀이 달빛처럼 비춰져도 내 마음이 요동치면 비춰지질 않으니까 마음을 명경(明鏡)처럼 맑게 삼매에 들게 해서 부처님의 지혜 법문과 하나 되는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위빠사나[관(觀)]해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자는 건데… 여기에 <경계의 내용>이란 문제가 하나 있거든요.
달은 중천에 떠 있는데 대야에 담긴 물과 같은 내 마음을 방구석에다 숨겨놓거나 방향을 반대로 놓았다 하면 제 아무리 삼매에 들어 마음이 잔잔해진들 달빛이 비춰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대야를 들어다 달빛이 잘 비추는 곳에 놓고 잔잔해지도록 돌보는 건데 <이처럼 달빛 비추는 곳에 옮겨 놓는 것>을 뭐라 그래요? 삼귀의(三歸依)라 그러지 않나요? 이게 바로 외도의 선정과 불교의 선정이 여기서 갈라지는 거거든요. 하나의 경계라 해서 외도가 제 아무리 선정을 닦는다 한들 달빛이 비춰지질 못해요. 그래서 이걸 지혜가 없어 번뇌를 끊지 못하는 명상(冥想)이다 그렇게 달리 부르는 겁니다. 만약에 비춰졌다 하면 그건 이미 삼귀의가 전제 되어 그리 된 거니까 이미 불자(佛子)가 된 겁니다.
결국 삼귀의(三歸依)가 안 되면 실상 깨달음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요. 어떤 얼간이 목사 하나가 자기도 깨달았다 떠벌리는 모양인데 그건 악귀(惡鬼)에 홀려서 미쳐 발광하는 거나 진배 없소이다.
왜냐? <삼귀의가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는 이치>를 꿈에도 모르니까 그렇게 멋대로 사기 치는 거거든요. 이처럼 하나의 경계에 안정(安定)되는 것이 사마타인데 여기에다 귀의(歸依)를 통해서 달빛이 비춰지면 급기야 보일 관(觀) 자를 써서 <위빠사나> 그러는 겁니다. 처음에 방향 위치 제대로 잡는다고… 흔들리지 않게 잘 놓는다고… 바람이 불면 막아준다고… 알뜰살뜰 돌보는 데만 37가지 조도(助道)의 품목(品目)이 있고 여기다 추가로 사마타를 보조하는 것이 저 사이비 위빠사나 패거리들이 한다는 소위 <마음 챙기기> plus +1 인데… 마음 챙기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마음으로 챙기냐가 관건예요.
시커먼 중생심(衆生心)으로 심사(尋伺) 각찰(覺察)하는 것을 공부라 할 건지 아니면 부처님께 지극히 귀의하여 불심(佛心)의 불지(佛智) 즉 삼법인(三法印)으로 내 마음을 다스릴 건지에 정사(正邪)가 갈려지는 겁니다.
저 사이비 위빠사나 패거리가 위빠사나 놀음 한지 이미 한 이십년 되었지 않나요?
그러면 이제 도인(道人)이 하나는 고사하고 반쪽이라도 충분히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소식은커녕 여전히 쥐 죽은 듯 조용하잖아요.

불교는 함부로 나대는 거 아니거든요.
만약에 위빠사나를 한다 치면, 위빠사나로 크게 한소식해서 참선하는 제방(諸方)의 선지식(善知識)들을 두루 찿아가 점검하고 끝내… 심심상인(心心相印)해서 인가(印可)마저 받고나면 그때서야 건당(建幢)하여 개산(開山)하는 거지, 미친 넘들 원숭이 흉내 내는 걸 가지고 공부한다 하는 거 아니거든요. 제발 정신 좀 차리셔… 비싼 밥 처먹고 왜들 그러시는지 참 이해가 안 갑니다.
인과적으로는 사마타가 없으면 위빠사나도 없는 까닭에 초학자들에게 송경(誦經)을 가르쳐서 위빠사나 하는 성문(聲聞)의 혜심(慧心)을 길러 사마타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게 소위 염처(念處)의 심사(尋伺)하는 마음 챙기기인데… 이것만 중뿔나게 연습한다? 잘 해보슈…

ex) 요새 참 재미있는 말이… 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가운데 법은 진리니까 진리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니까 나는 부처도 안 믿고 중들도 안 믿고 오로지 진리만 믿겠다 하는 말인데… 부처 다음에 법이 있지 법 다음에 부처 있는 게 아녜요.
부처님이야말로 진리의 당체고 진리의 화신인 것이지 진리가 따로 있어서 부처 버리고 중 들도 내치고서 달리 구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만약 그렇다 하면 이건 이른바 축물(逐物)이라 해서 한나라 강아지 마냥 죽자하고 뼈다귀 물어다 주인 갖다 주고… 주고… 주고 하다 끝장나는 거요. 이런 건 공부가 아니요. 바깥 경계에 끝없이 매인거지. 이런 이치를 어찌 말하냐 하면 진리가 사람을 따라오도록 공부해야지 사람이 진리를 따라다녀서는 평생 중생 노릇 못 면한다 그렇게 말하는 거요.
정말로 쇠뿔은 단김에 뽑는 건지 잘 모르겠으나 공부에는 영과(盈科)라 해서 다 순서가 있답니다.
먼저 복을 많이 쌓고 다시 삼세제불(三世諸佛)에 귀의 참회해서 업장을 녹이고 다시 부처님 말씀을 잘 새겨서 오매불망 잊지 앉게 된 연후에나 선방에 가서 참선 한다거나 남방에 가서 공부한다거나 하는 거지, 지 성질 못 이기고 세상 상대로 땡깡 부리는 걸 공부라 하지 못한다는 거… 좀 새겨 들으슈… 철 좀 드셔… 파리 마냥 여기저기 들러붙는 누구 누구들 말이요. 나이도 먹을만치 먹었으면 이제는 좀 나이값을 하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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